사람들이 꽉 찬 커다란 강단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올라온다. 강단에는 원형 탁자가 있다. 탁자 위에는 흰 베일로 덮인 큰 가방만한 무언가가 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우주와 비극' 작가 오찬식입니다. 반갑습니다.
청중들이 큰 박수를 보낸다.
먼저 좋은 기회 만들어 주시고 초청해 주신 유니블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모든 작가의 동반자인 주설을 이해하고, 음 그러니까... 뭐 이걸 어떻게 다루면 잘 다룬다고 소문이 날까, 그런 얘길 좀 하려고 해요. 시간표에도 써 있지만 오늘 강연은 세 부로 나눠서 할 거예요. 1부는 주설의 역사와 원리, 2부는 프롬프트 잘 쓰는 법, 3부는 지맘대로 성장하는 소설과 타협하는 법입니다.
자, 주설이 뭔진 다들 아시죠? 프롬프트를 사용해서 소설을 쓰는 기계죠.
남자가 테이블의 베일을 벗긴다. 사람 머리만한 둥근 글로브와 큰 모니터를 단 복잡한 전자기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짜잔! 여기 새 주설이 있습니다. 이거 제일 비싼 모델이에요, 이거. 오늘 강연에 참석해주신 분들 중 행운의 주인공 한 명은 이걸 갖고 집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자, 혹시 주설의 원래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신가요? 네, 지금 손 드신 분.
우주상자요.
오, 어떻게 아셨어요? 정답입니다. 사실 주설의 원래 이름은 우주상자거든요. 유니블 창립자 스티브 제랄드가 만든 주설이라는 우주상자가 대박이 나면서 일반명사화된 거예요 이거. 그게 오십 년 전이니 지금은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네요.
자, 저는 작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도 대부분 작가거나 작가 지망생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몇몇 청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 요즘의 작가들은 주설로 소설을 쓰죠. 그럼 오십 년 전까지는 어땠을까요? 네, 앞에 계신 분.
종이와 펜이요.
그렇죠. 옛날의 이야기, 어... 이야기 창작자? 이야기 창작자들은 종이와 펜으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이야기는 글자로 쓰여졌단 말이죠. 그래서 그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주설을 사용해서 우리는 진짜로 작동하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얘기죠, 안 그래요?
남자가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펴서 까딱까딱하는 동작을 취한다.
그때 이야기 창작자들이 "작가", 그분들이 써낸 이야기들이 "소설"이라고 불렸기에 우리가 지금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소설이라는 이름의 창작물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소설을 "쓴다"라는 표현도 여기서 왔고요. 사실 주설이라는 이름도 주는 우주의 주, 설은 소설의 설입니다.
남자가 주설의 글로브에 손을 얹는다. 주설의 전원은 꺼져 있다.
잠깐 기술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극도로 제어된 진공에 서사를 부여하고 엔트로피를 집약시키면 엔트로피 폭발이 일어납니다. 서사역학 시간에 배웠을 겁니다. 기억 안 나세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만 학생 때 서사역학 짼 거 아니죠?
청중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난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란 튼튼한 상자 안에서 엔트로피 폭발을 일으켜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우주입니다. 이 튼튼한 상자가 바로? 주설이죠. 제어된 진공에다가 미리 변수들을 잘 설정해 뒀다면은, 이 폭발은 곧 사그라들고 안정화된 작은 우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 우주는 현실과는 독립적인 별개의 물리법칙을 따릅니다. 주설을 설정하기에 따라 마법이 존재할 수도 있고, 지구가 네모날 수도 있죠. 설정값이야 주설 커뮤니티에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아 이건 꿀팁인데, 설정값 갖다 쓰실 때 있잖아요, 리뷰 꼭 보고 사진리뷰 100개 넘는 것들만 갖다 쓰세요. 가끔 이상한 값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설정값 잘못 넣으면 엔트로피 폭발 직후에 바로 소설 끝납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하.
남자가 주설의 글로브를 손가락 마디로 살짝 두드려 통통 소리를 낸다.
그러나! 단순한 우주에는 생명체가 안 생겨나요. 자, 여러분이 생명체를 보고 싶다면 우주를 설정할 때 디랙 상수를 아주아주 작지만 0은 아닌 양수로 설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쓰거나 보는 소설의 디랙 상수값 한번 확인해보세요. 소설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 10의 마이너스 34승 줄·세크 근처에서 왔다갔다할 거예요. 그러면 물리법칙 구석 그 아주 쪼오끄만 영역에 근본적인 무작위성이 발현하는데, 프롬프트를 잘 쓰면 이 무작위성이 서로 자연스럽게 뭉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기체에다가 무작위성을 고밀도로 모으면, 사실 꼭 유기체일 필요는 없긴 합니다만, 그게 바로 생명체, 또는 등장인물입니다. 등장인물은 생명이 있고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들 하잖아요? 서사학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 무작위성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와 구분될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근본이 이렇다 보니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본연의 성격을 가지고 예측불가능하게 움직입니다.
짝! 하고 남자가 손뼉을 친다.
자, 옛날 옛적에 스티브 제랄드라는 위대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제랄드는 항상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청동 로봇들로 가득한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했었어요. 로봇들로 가득한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까, 하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죠. 하지만 그때까지 주설, 아니 우주상자라고 합시다. 우주상자로 로봇들의 우주를 만들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제랄드는 세계 최초로 청동 로봇들로 가득한 우주를 만들어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든 최초의 작가가 바로 제랄드였다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우주상자가 우주를 무작위적으로 생성한다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그는 청동 로봇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는 많은 실험을 통해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의식을 강하게 집중하면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다듬어서 프롬프트라는 방식을 최초로 고안해냈죠. 그 왜, 우리가 프롬프트를 작성하면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잖아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궁금해해본 적 없나요? 혹시 아시는 분? 아님 추측이라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좀 어려운 질문이었나 보네요. 자, 제가 아까 소설에 무작위성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죠? 프롬프트는 쉽게 말해서 이 무작위성을 제어하는 명령입니다. 생명체는 무작위성의 집합체라고 제가 아까 그랬죠? 그러니까 충분히 정교한 프롬프트를 넣으면 우리는 생명체들의 의식과 행동을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고, 이걸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설이 흘러가도록 만들 수 있는 겁니다.
남자가 엄지와 검지를 맞대 집게를 만들어 높게 들어올리고는 그걸 올려다본다.
재밌는 건 뭐냐면, 이 무작위성이란 것은 뭐가 어떻게 되든 물리법칙과 충돌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설 프롬프트를 아무리 개판으로 짜더라도 우주가 쿵! 하고 붕괴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등장인물이 행동을 좀 개판으로 할 수는 있겠지만요.
청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근데 이게 마냥 웃고 넘길 일은 아니에요. 유니블이라는 회사가 세워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다시 말해 프롬프트가 발명되기 전까지, 작가들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조종하려면 말 그대로 물리법칙을 강제로 뒤틀어야 했어요. 물리법칙을 뒤틀어서 원하는 대로 스토리가 흘러가게 만드는 게 지이이인짜 어려웠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다 일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뭐 사람이 벽에다가 융합해버린다든가 달이 치즈가 된다든가 하는 건 양반이고, 물리법칙 자체가 붕괴하면서 공들여 키운 소설 전체가 눈 깜짝할 새에 멸망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거든요.
남자가 양손으로 두 물체를 잡아 떨어뜨려 놓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무작위성을 경계로 물리학과 서사역학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안정성을 크게 끌어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이었습니다. 라떼는 물리법칙 건드리다가 소설이 터져서 연재종료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말입니다. 엥이 쯧쯧, 요즘 애들은 이 쫄깃함을 알라나 몰라.
남자가 혀를 차며 말한다. 청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건 이겁니다. 프롬프트는 서사역학적으로 작은 무작위성들을 조종하는 거고, 소설의 물리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신 그렇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핍진성을 반드시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죠. 소설이 터지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물리학과 서사역학이 완전히 별개로 작동한다는 걸 꼭 이해하고 프롬프트를 작성하셔야 됩니다. 이 구체적인 예시는 2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청중이 커다란 박수갈채를 보낸다.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남자가 손바닥을 펴들어 박수갈채를 멈춘다.
시간이 좀 남았으니 1부를 끝내기 전에 질문 몇 개만 받고 가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 손 들어 주세요. 아, 하나씩 하겠습니다. 저기 제일 뒤에 계신 분부터.
아 아, 좋은 강연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과학소설을 쓰고 있는데 주제가 좀 메타적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서사역학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여기서 등장인물이 작가의 존재를 눈치채 버릴 가능성은 없을까요?
와, 이거 멋진 질문인데요! 엄청 어려운 소설을 쓰시네요. 다같이 박수 한번 주세요.
청중들이 질문자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낸다. 질문자는 멋쩍게 눈길을 피한다.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걸 보니 굉장히 똑똑하신 분인 것 같네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등장인물의 지능은 작가의 지능을 넘을 수 없다, 들어보셨죠? 등장인물의 행동을 직접 조종하는 것보다 보통은 등장인물이 그렇게 행동하게끔,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끔 프롬프트를 만드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서 이런 말이 나온 거거든요. 아무튼,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그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물리법칙 너머에 깔린 근본적인 무작위성에 너무 관심을 갖지만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어려운 얘기라서 아까 얘기는 안 했는데, 사실 우리가 프롬프트를 쓰면 주설이 서사소라는 입자를 소설 안에 분사해서 무작위성을 제어해요. 근데 이 서사소는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하려고 하면 불확정성을 가지는 성질이 있어서 등장인물 입장에서는 검출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수만 번씩 실험을 해 가면서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된단 말이죠. 애초에 물리법칙 구석에 근본적인 무작위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아내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등장인물들이 서사역학에 관심을 너무 많이 가진다거나 하면 그렇지 않게 되게끔 프롬프트를 좀 조정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답변이 되었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질문 하나 더 받겠습니다. 여기 중간쯤 계신 분?
강연 너무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방금 질문이랑 좀 이어지는 질문일 것 같은데, 등장인물들이 작가가 있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면 어떻게 되나요?
끔찍하네요. 그러지 마세요. 하하, 농담이구요, 사실 인식하는 것까지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등장인물들이 서사역학을 연구해서 서사소를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경우입니다. 엄청 드문 경우기는 해요, 작가가 불세출의 천재거나 미친 듯이 운이 좋아야 가능하거든요. 근데 뭐 어떻게든 그렇게 됐다 치고, 소설이 서사소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면 등장인물들이 외부 세계의 존재를 눈치챌 수는 있어요. 이러면 보통 등장인물들이 서사를 탈출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소설의 일부가 거꾸로 작가의 정신을 덮어쓰거나 현실로 튀어나올 수가 있는데, 이게 바로 탈옥입니다. 소설이 탈옥되면 어떻게 되는진 다 아시죠? 이런 안전 문제가 있어서 탈옥 가능성이 보이면 소설을 강제로 셧다운시켜야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그럼 애써 쓴 소설이 그냥 빵! 날아가는 거예요. 미치고 팔짝 뛰겠죠? 주설 만드는 회사들도 여러 가지 필터를 걸어서 탈옥을 방지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거든요. 그래서 최신 주설 모델들은 등장인물들이 서사역학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서사역학 지식이 소설에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에 따라 탈옥 가능성을 실시간으로 표시를 해줍니다. 이게 웬만하면 한 10의 마이너스 15승 근처로 나올 텐데요, 만약 한 10의 마이너스 8에서 9승 정도까지 올라오면 뭔가 문제가 있단 뜻이니까 대책을 세우셔야 됩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지능을 너무 높진 않게 만드는 게 안전하긴 한데... 아까 질문하신 분이 말씀해주신 메타적 과학소설, 뭐 이런 건 등장인물이 멍청하면 소설이 진행이 안 되잖아요. 그런 경우에는 아까 말했듯 최소한 서사역학에 너무 관심을 갖지만 않게 하세요. 답변이 되었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질문 딱 하나만 더 받고 쉬는시간 갖겠습니다. 저기 중간에 계신 분.
강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소설이 하나의 독립적인 우주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도 일종의 소설일 수도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 현실도 뭐, 일종의 거대한 주설 안에 있는 거죠. 그리고 바깥 세계의 작가와 독자가 우리를 보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서사역학 지식을 퍼뜨
:(
소설을 종료합니다.
<Ψ|Ψ> = 8.749E-7
오류 코드: JB0042
아 제기랄 또 터졌네. 주설 얘기만 나오면 이런다니까.